디지털노마드의 삶, 해외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나는 당신의 아내이지, 엄마가 아니야

결혼 준비 과정에서 나는 당당하게 집안일에 대한 ‘업무분담각서’를 내밀었다. 여자들과 동거할 때는 내밀지 않던 각서를 내민 이유는 불합리한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석사공부와 창업을 병행하는 과정에서도 가사와 육아노동을 대부분 혼자 도맡아 해야만 했다.

훗날 나는 집안일을 하나도 모르는 그와 역할을 나눌 때, 항목을 세세히 적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사노동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 단어로 쉽게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청소’만 해도 정리 정돈, 먼지 털기, 불필요한 물건 버리기, 청소기 먼지 통 비우기, 걸레 빨기 등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다. ‘빨래’는 세탁물 모으기, 세탁기 돌리기, 널기, 걷기, 개기, 옷장에 넣기 등의 연결된 일들이 있다. 이런 구체적인 항목 없이 한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정했더니, 남편이 맡은 일조차 상당 부분 내가 하는 형국이 되었다. 

남편 담당인 설거지는 한겨울 눈더미처럼 수북하게 쌓여만 갔다. 2주 정도 지나자 집안의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꺼내 쓰게 되었고, 남편은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 싱크대 안에 설거지거리를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릇에 담긴 물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남편은 그 물을 버리고 다시 그릇을 쌓았다. 

혼자 살아본 적 없는 남편은 누군가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냄새가 날 뿐만 아니라, 밥 먹을 그릇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희생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아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그 희생을 아내인 내게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사소한노동도매일하면힘들다

“아빠가 밤에 여기서 뭐 먹었나 봐.” 

남편이 머물었던 자리는 여섯 살 짜리 아들도 바로 알아 차린다. 먹었던 그릇이나 쓰레기가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사진을 한 장 찍어서 남편에게 보냈다. 주방 한구석에 남편이 어질러놓은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찍고, 거기에 분홍색 화살표로 표시를 해서 보냈다. 

그러고 나서 남편이 있던 다른 장소도 둘러봤다. 역시나 정리해야 할 물건이나 쓰레기가 발견되었다. 지난 6년을 매일매일 저런 것들을 치우는데 시간을 썼다고 생각하니 갑갑하기만 했다. 이제는 계속 이런 식으로 사진에 표시해서 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남편이 모르는 새 나의 노동력이 허비되는 것이 싫었고, 최소한 그가 알고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이런 사소한 것들을 치우는 게 벅차지는 않았다. 무심하고 당연하게 힘들어하지 않고 정리하며 살아왔다. 어처구니없게 들리겠지만, 남편이 있던 자리마다 남은 쓰레기를 볼 때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조그만 휴지뭉치 하나가 보이면, 코를 풀었나? 먹다 흘렸나? 입을 닦았나? 정말 맛있게 먹고, 행복하게 놀다가 룰루랄라 휴지를 던져놓은 건지도 궁금했다. 

‘잠꾸러기낭군님이 쿨쿨 자다가 일어나서 냠냠 먹었나 보다~’

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움은 정신적, 신체적 괴로움을 이길 수 없었고, 이제는 휴지뭉치만 보면 남편 얼굴에 던져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기도 한다. 

남편의 문제는 ‘정리 정돈 능력’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습관화된 게으름’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자기가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이 내게 떠넘겨진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다.

이제 나는 남편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내 신체 상태에 적합한 노동만을 허용한다.

당연하게주어지는노동이불편하다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내게는 당연했다. 식탁 위에는 심심할 때마다 집어 먹을 간식거리가 준비되어 있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을 두고 둘러앉아 식사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가정의 모습이었다. 이런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대단한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일절 억울한 마음 없이 내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요리, 그 요리를 더이상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아이의 탄생이었다. 출산 후 육아를 시작하면서 요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육아가 전부 나의 일이 될 거라고는 미처 알지 못했다. 산더미 같은 일들이 몰려든다는 사실도.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장을 보고, 식재료와 냉장고를 관리하고, 요리를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해야 한다. 요리를 그만두면서 이 모든 일은 안 해도 되는 일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요리는 거의 하지 않지만 ‘먹는 것’과 관련된 모든 일을 맡고 있다. 장보기, 냉장고 식재료 관리하기, 음식물 처리하기, 설거지 등등. 요리는 하지 않지만 가족들이 먹을 것은 여전히 내가 준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죄책감은 여전하다. 요리는 여자인 나의 의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왜 이리도 힘든 걸까?

여섯 살 아이에게도 나의 노동은 당연하다. 언젠가 빨래를 널며 48개월 된 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이 옷이 대부분이기도 했고, 슬슬 집안일에 참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싫어. 엄마가 해야지. 엄마 일인데”라고 말하며 나를 놀리듯 짱구춤을 췄다. 충격이었다. 

아이는 나와 남편을 분명 다르게 대한다. 유치원 준비물을 제대로 못 챙기면 나를 타박하고, 옷이 필요하면 내게 빨래를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럴 때면 다 받아주지 않고 아빠의 역할도 생각하게끔 유도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성역할 구분에 매일 놀란다. 유치원의 문화나 구조 또한 아이들에게 성역할을 철저하게 교육시킨다. 

비영리 기관에서 운영하며 인성 교육을 중시한다는 우리 아이의 유치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첫 유치원 가족 모임에서 나는 바느질을 했고 남편은 텃밭을 갈았다. 내게 텃밭을 선택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유치원에서 보내는 모든 문자는 남편을 배제하고 나에게만 온다. 양육자가 꼭 참석해야 하는 활동에도 나만 초대한다. 

우리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을 하며 살고 있다.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해야만 하는 온갖 노동에서 슬쩍 모른 체하며 발을 빼는 남편보다 더 싫은 건, 내게 노동을 강요하는 이 사회이다. 나는 노동을 선택할 수 없다. 

여자와사는게낫다

남자와 5년을 넘게 살아보니 의문만 한가득이다. 남자와의 동거에서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20대 초반에 독립해서 살았던 나는 두 명의 친구와 살아본 적도 있고 친여동생과도 오랜 기간 함께 살았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가사를 분담했고, 어느 한 쪽이 바빠서 일방적으로 하게 되면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했다. 

여자와의 동거에서는 나에게 주어진 노동의 강도가 현저히 높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물론, 여자와 함께 살았던 경험이 무조건 편안했던 건 아니고, 생활습관이 부딪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여자와 사는 것이 남자와 사는 것보다 몸이 힘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결혼 후 처음 겪어본 남자와의 동거에서는 게으름이 가능하지도, 용서되지도 않았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주지 않았고,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드러나지 않았다. 얼굴에 철판을 깐 남편은 자신이 게으르다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나는 내가 부지런하지 않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완벽한 아내, 완벽한 엄마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꼈다. 

다른 누군가와 살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나의 부족함이 결혼 생활에서는 신랄하게 들춰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결혼 제도’가 혼자서는 외로운 사람이 누군가와 의지하며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여자끼리 결혼해야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자노동에 시달리며 잠깐의 글 쓰는 시간조차 내기 어려운 요즘, 날 도와주고 위로해줄 누군가가 절실하다. 어쩌면, 나의 두 번째 배우자는 여자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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