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들은 정이 많고 따뜻하다. 나도 인정하는 바이고 그래서 좋아하는 관계도 여럿 있다. 그런데 정작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 불편할 때가 종종 있다. 참 좋은 사람들이고, 우린 좋은 관계임에도 불편한 순간들.
내가 항상 공감해줘야 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동의하는 척해야 하고, 공감하지 않아도 공감하는 척을 해야 한다.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내가 동의하고 공감해야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함께 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것을 오랜 관계에서 학습했다.
내 의견보다 내 감정보다 상대를 중요시하는 것, 배려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불편하지 않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위로도 할 수 있고, 이해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감은 다르다. 내가 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져야 할 수 있는 게 공감이다.
“나도 그래. 내 생각도 그래. 내 감정도 그래.”
안타까운 건 많은 순간들에 나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내가 평범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아서 감정이 부족할 수가 있다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을 떠나서 왜 우리는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추구해야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오늘 프레젠테이션 너무 못했어. 학점 안 나오면 어떻게 하지? 너무 속상해.”
이 말 뒤에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한국에서 평생 살면서 학습된 멋지게 공감하는 대화.
“그랬구나. 나 같아도 정말 걱정되고 속상할 것 같아. 어쩌냐.. 힘내. ㅠㅜ”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고 내 생각을 말하는 방식.
“그래, 속상하겠다. 학점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항목은 없어? 오늘 맛있는 거 먹고 거기에 집중해 볼까?”
이런 주제는 그나마 괜찮다.
화가 난 것을 공감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나는 비관적인 대화나 남을 욕하는 것에 전혀 공감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나면 당사자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삼자가 공감해 주며 같이 욕하면 화나는 감정이 커지거나 화난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인 경우 같이 욕해주는 게 기분 나빠지기도 한다. 내 남편 욕을 내가 하는 건 괜찮지만 남이 하면 기분 나쁜 그런 감정 말이다.
언제는 시어머니가 남편을 안 좋게 얘기하셨다. 내가 너무 힘들었던 시기라서 내 편을 들어주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내가 남편을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전화기 너머로 황당해하시는 모습이 느껴졌었다.
나는 보통 누구를 욕하고 싶을 때 함께 욕해주지 않고 내 마음을 잘 다스려주는 사람을 찾아간다.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것을 자세히 알려주고, 마음을 진정시켜 주며 해결방법을 함께 고민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나도 그런 류의 사람이고 싶으니 상대의 모든 감정에 무조건적인 공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한 것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친구가 되고 싶은 나의 욕구는 가식적이라도 공감해야 하는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해도, 내가 다른 감정을 가져도,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다름을 인정해 준다면 억지 공감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말이다.